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찰스 2세 (문단 편집) == 통치 == 1649년 2월 5일, [[올리버 크롬웰]]의 혁명에 반대하던 [[스코틀랜드 왕국]]에서 찰스 2세를 왕으로 추대하자 찰스 2세는 이에 호응하여 6월 스코틀랜드에 상륙했고, 1651년 1월 1일 스콘에서 [[대관식]]을 받고 스코틀랜드 왕위에 올랐다. 그 다음엔 스코틀랜드군과 잉글랜드 내의 왕당파들과 함께 크롬웰의 군대와 맞서 싸웠으나 [[던바 전투]], [[우스터 전투]]에서 역으로 참패하였으며 크롬웰이 스코틀랜드까지 쳐들어와서 다시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후 그는 크롬웰 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프랑스에서 찰스 2세는 프랑스 국왕이자 외사촌 [[루이 14세]]가 주는 생활 보조금 600 리브르로 살아갔다.[* 이는 찰스 2세의 어머니가 프랑스의 공주 출신이었기에 가능했다.] 찰스 2세는 프랑스에서 잉글랜드 왕위를 되찾으려고 노력했으나 크롬웰이 잉글랜드에서 확고하게 정권을 잡고 있는지라 할수가 없었다. 그러던중에 1658년 올리버 크롬웰이 죽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호국경이 된 아들 [[리처드 크롬웰]]이 잉글랜드 내부의 반크롬웰파 세력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실각해 크롬웰의 잉글랜드 연방 공화정 정부가 몰락하여 1660년, [[왕정복고]]가 이루어지자 왕위에 올랐다. 크롬웰 독재 정권에 질릴대로 질린 잉글랜드의 백성들은 잉글랜드로 귀국하여 말을 타고 들어오는 찰스 2세를 보고는, 남녀노소 가릴 것없이 모두 환호했고 성당의 종까지 댕댕 쳐대며 "국왕 폐하 만세,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라고 소리치면서 그의 귀국을 환호했다. 왕위에 오른 찰스 2세는 1661년 찰스 1세 처형 12주년을 맞아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올리버 크롬웰]]을 [[부관참시]]하여, 그의 머리를 참수하고 몸통을 네 조각내어 시가지에 걸어놓아 시신에게 온갖 수치를 당하게 했다. 크롬웰은 사망 당시 왕실이나 귀족 또는 명사들이 별세했을 때 쓰인 장례 예법대로 장기와 뇌를 꺼내고 약품에 절여 [[엠버밍|방부처리]] 되어 관에 봉안되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많이 행해진 장례법이라 한다.], 이 방부처리가 [[쓸데없이 고퀄리티|쓸데없이 잘 되어 있어]] 찰스 2세의 명령에 따라 시신을 효수하기 위해 머리를 자르는데 30번이나 내리쳐야 했다고 한다. 뒤이어 크롬웰의 추종자들 중 찰스 1세의 사형을 주도한 26명에게 줄줄이 교수형을 내렸다. 하지만 찰스 1세가 의회를 적으로 돌려 결국 처형됐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어 나머지에 대해서는 관용을 선택했다. 사형에 소극적이었으나 크롬웰에게 은혜를 입거나 해서 어쩔 수 없이 참여했거나 역할의 정도가 크지 않았거나 소속된 당이나 여론에 휩쓸려서 찰스 1세의 사형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찬성한 정치인들의 경우 사형시키지 않고 대부분 추방 혹은 징역을 잠시 내리는 선에서 끝났고 크롬웰파가 아니라 사형에 찬성하지 않았던 의원들은 아예 건드리지 않았다. 새 왕이 당연히 아버지의 원수들에게 복수할 것이라고 여기면서 벌벌 떨던 사람들 상당수는 숨통이 트였고, 이렇게 사형을 피해간 사람들은 모두 석방 이후에 찰스 2세의 지지자가 되었다. 사실 찰스 2세는 전제군주제를 추구하여 의회와 대립하다가 청교도 혁명을 초래하여 목이 날아가버린 아버지 찰스 1세와 달리, 신중한 성격인터라 아버지처럼 할 경우 자신도 최소 추방이 기다린다는 걸 깨닫고 귀족층과 의회와 협의를 하며 통치를 했다. 물론 당시 잉글랜드 의회의 위세가 크롬웰의 독재 정치를 겪으면서 크게 실추되어 있었기에, 찰스 2세 역시 의회와 크게 갈등하여 의회를 압박하거나 해산하기도 했으나, 언제까지나 정치다툼의 일환일 뿐 이들을 배제시킨 적은 없었다. 즉 자신의 아버지이자 부왕이던 찰스 1세와 달리, 의회 세력들을 완전히 적대하거나 배척하지 않으며 왕실-의회와의 협력 체계를 유지했다. 1679년에 의회는 자유에 관한 중요한 법안인 '인신 보호 영장'을 통과시켰다. 한국어로 번역되기 전 원제는 Habeas Corpus Act이며, '몸을 가지다'라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따온 것. 판사가 고소당했음을 명시하기 전에 죄수들이 영장을 구할 수 있도록 하고 재판이 있기 전에는 죄수를 무기한으로 억류할 수 없게 하는 법안이었는데, 이로 인해 잉글랜드의 군주들은 단순히 자신에게 반대한다는 이유로 사람을 간단히 감옥에 넣거나 사형시키는 등의 처벌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법안에 찰스 2세는 반발했으나 힘으로 할 경우엔 부왕의 전철을 밟을까봐 마지못해서 법안을 승인한다. 물론 찰스 2세도 가만 있지 않았고 자신에게 호의적이며 충성하는 사람들을 판사로 임명하여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처벌할 때 자신에게 유리하게 판결하도록 하는 등 법을 흔드는 걸 잊지 않았다. 재위 중 두 차례의 [[영란전쟁]]을 벌였으나 기습한 2차와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밀약을 맺었던 3차까지 모두 대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정책에서는 크롬웰 정권의 잔재를 청산하고 아버지이자 전 국왕인 찰스 1세와는 다르게, 귀족들과 협력하며 안정된 국정 운영을 했다며 잉글랜드 백성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으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의회가 원하던 대로 입헌군주제에 상당히 근접한 형태로 통치해야 했고, 또 그렇지 않더라도 크롬웰에 비해서는 인간적인 방식으로 통치를 했기 때문에 이런 평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표면상으로는 잉글랜드 [[성공회]] 신자였으나 실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고, 실제로도 가톨릭 신앙을 몰래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가톨릭을 국교로 재도입하는 것과 같은 비현실적인 정책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으며, 몰래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던 사람들을 잡아죽이는 짓을 안 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죽기 직전에 가톨릭 사제[* 존 허들스턴(John Huddleston, 1608~1698)이라는 신부로 우스터 전투(1651)의 패배 이후 의회파에게 쫓기던 찰스 2세를 도와주었다.]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죽기를 원해서 몰래 사제가 궁정에 들어와서 임종을 지켰다. 당시 비밀이었던 왕의 진짜 신앙을 알고 있었던 프랑스 출신의 애첩[* 포츠머스 여공작 [[루이즈 드 케루알]]. 이 사람의 아들인 찰스 레녹스는 초대 리치먼드 공작이다.]이 동생 제임스 2세를 통해 중개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